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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놀이/공감 글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장편소설

by 배스노리 2022. 3. 21.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2011년 영연방 최고 문학상 맨부커 수상작. 영국 문학의 제왕 줄리언 반스의 최신작. 이라고 소개되어 있던 책.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기억은 우리를 배반하고, 착각은 생을 행복으로 이끈다..

1960년대 영국 케임브리지. 장래가 촉망되던 장학생 에이드리언 핀이 욕실에서 동맥을 긋고 자살한다. 철학적이고 총명한 수재였던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 받았다. 심지어 친구의 여자친구 베로니카에게서도. 아무도 그 자살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사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의 친구였던 앤서니 웹스터는 자신이 무심코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이제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한 통의 편지가 엄청난 파국을 불러왔음을 알게 된다.

- 커버

 

독서놀이 시작하고 두번째로 읽기 어려웠던 책. 

내용이 어려운건 아닌데.. 뭐랄까. 주인공이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라 힘들었다고 해야하나. 책이든 영화든 별의별 악역들이 존재는 하지만.. 그런 악인까진 아닌데도 이렇게 짜증나고 거슬려서 못읽겠던건 처음인거 같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류의 최악의 인간상이..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이야기를 해대니.. 그의 시선과 사고관을 따라 어쩔 수 없이 같이 나아가야 하는 그 강압? 강요?의 시간이 너무 괴로웠다. 특히나 주석같이 달린 것들이 정말 신경을 거슬리게 해서... 책 읽으면서 이마이 스트레스 받기도 처음인 듯. 

 

그럼에도.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뻑하는 충격과 함께 다시 첫장부터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이 망할놈의 에너지 뱀파이어 주인공 시키가.. 나를 아주 제대로 가지고 놀았고... 정말 대차게 기를 쭉쭉 빨아먹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구조를 세운다. 그런 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고 말한다. 

 

나도 종종 빠지게 되는 확증편향 문제라 해야하나.. 이미 정해놓은 답에 끼워맞추기 위한 생각들로 소모적 시간을 보내고 후에 뭔가 잘못됨을 감지했을 때 미련하고 편협했던 모습을 후회했던 것 같다. 과정 이전에 결론을 내지 않도록. 항상 신경쓰고 싶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그리고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작년부터 삶을 때우지 말고 채우자는 결심을 하고. 그렇게 종종 애쓰다 이 문장과 만나게 되니, 뭔가 그냥 뿌듯해서 좋았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앞 문장들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떠올랐었고, 뒷 문장은 때때로 분명 확신했던 생각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해지기도 했던 내가 떠올라 남기고 싶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아주 예전에 느꼈던 적이 있다. 기억은 참으로 이기적이어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싶은대로 기억한다는 것을. 나빴던 것도 좋게. 좋았던 것도 나쁘게. 시시때때로 바뀌며 나에게 유리하게만 나타나는 기억이라는 것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이십대에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후로... 그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뜬금없이.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감퇴되는 듯한 느낌은 노화라고만 생각하며 씁쓸했는데.. 메모리 용량으로 생각하니 위안이 된 느낌. ㅋㅋ 이미 너무 많은 것이 꾹꾹 차있어서.. 더 많은 것을 넣기에 당연히 더 어렵지로 생각해도 되면.. 기분이 좋은데? 

 

대충 남기고픈 기록이 여기까지.

 

신경질나도록 뭐든 되도안하게 썩은 의미부여로 생각 조차 정말 역겹고 불편하게 시끄러운 이 남자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졌지만. 덕분에 건강하고 올바른 가치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어 매애애애애우 고오오오맙다. 젠장. 수 시간을 토할 것 같은 같잖은 가스라이팅에서 고생한 나 자신에게 토닥토닥을 해주고 싶은 심정... 이었지만. 전혀 상상도 못했던 대 반전의 충격은. 그 고생이 한순간에 휙 날아가버릴 최고의 재미였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이 책을 보면서 두가지 영화가 떠올랐었다. 조 헌트 영감의 수업방식은 죽은 시인의 사회가 떠오르기도 해서 처음엔 엄청 흥미 갔었는데... 써글 토니 웹스터새끼.. 결말을 보고 나서는 올드보이가 생각났다. 결국 인간은 말을 조심해야 하는... 그 이전에 생각 자체를 조심해야함이겠지. 어우. 분명 재미는 엄청 있는데 다신 기억도 하기 싫은 이 기분은 뭐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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